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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눈에 안 보이지만 보이는 것

내일이면 매주 한 번씩 우리 집 살림살이를 도와주는 가정부 아주머니가 오는 날이다. 매일 직장 일이 바쁜 나는 오늘 아침에도 행여나 출근 버스를 놓칠세라 서둘러 집을 나서면서 한 번 더 돌아보아야 할 어질러진 집 안을 그냥 문만 잠그고 나섰다. 그동안 며칠을 미루어 온 집 안청소와 밀린 빨래며 냉장고 안 음식 정리는 말할 것도 없고 집 밖으로 내다 버려야 할 무거운 쓰레기를 그냥 놔둔 채 서둘러 나선 것이다.   아침부터 나의 소아 진료소 안은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들로 마치 장마당처럼 붐비고 소란하다. 성인들을 진료하는 것과는 달리 신생아부터 18세 환자를 돌보는 소아과는 환자들에게 늘 부모나 다른 보호자가 따라와야 하므로 그리 크지 않은 진료소가 더욱 그렇게 늘 붐비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쉴 사이 없이 성장한다. 그리고 이들의 건강을 돌보는 전문의들은 이 어린이들의 육체적 건강상태 점검과 함께 유아들은 때맞추어 접종해야 하는 적지 않은 수의 예방 주사, 그리고 그들의 정신 발달과 몸의 성숙도까지 면밀히 점검하는 것까지 소아과 의사들의 임무이기 때문에 한 환자에게 소요되는 과정이 절대 간단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바쁜 일과 도중에 우리에게 점심시간이 있다는 것은 아주 다행한 일이다. 이 시간은 진료 도중에 생기는 육체의 피로와 정신적 과로와 함께 오는 허기를 일단 해결하고 오후에 또 몇 시간 동안 아직도 차례를 기다리는 환자들을 더 진료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날도 고된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 문을 열고 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내 느낌이 무언가 달라서 잠시 주위를 돌아보았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내가 오늘 집을 나서기 전에 그냥 현관 앞에 두고 간 쓰레기가 우선 눈에 안 보이는 것이다. 분명히 우리 가정부가 일하러 오는 날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인데 말이다. 내가 없는 동안 누군가 우리 집 안을 말끔히 청소해 주었고 어지러운 부엌 바닥과 서재 책상 위에 널브러지고 쌓여 있던 책들과 모두 잘 정리해 놓았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면서 냉장고 문을 열다 말고 나는 ‘아-, 어머니’ 하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어머니를 소리 내어 불렀다. 거기에는 어머니가 만드신 열무김치와 장조림 그리고 멸치볶음 등 내가 즐겨 먹는 밑반찬이 작은 뚜껑 덮인 그릇에 조목조목 담겨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여기서 아주 먼 거리에 살면서 당신의 딸을 보러 오려고 벼르고만 있다가 그날 손수 만드신 음식을 싸 들고 오셔서 집 안 청소까지 해주신 후 서둘러 떠나신 내 어머니 모습이 눈물 고인 나의 눈에 선하게 보였다.   우리는 가톨릭 신부로서 남수단 톤즈 마을에서 예수님처럼 희생적인 사랑으로 의료 봉사를 하다가 일찍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이태석 신부 얘기를 ‘울지마 톤즈’ 다큐멘터리를 보아서 안다. 신부님의 별세 10년이 지난 후 구환 감독이 남수단을 방문하여 놀라운 현실을 보았는데 그 당시 어린 학생들이 자라서 그중에서 의사가 되어서 신부님처럼 사랑으로 의료 봉사를 하는 이들과 아직 의대생인 학생이 무려 57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자신은 불교 신자인 구환 감독이 “나는 그때 톤즈 마을에서 예수를 보았습니다”라는 고백을 한 일이 있다고 한다.   나는 오늘 아침에 플로리다에 여름 특유의 장대 같은 비가 한차례 지난 후 높고 푸른 하늘에 한 점 솜털 같은 흰 구름이 걸려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 아름다운 세상을 우리를 위해서 지으신 예술가 하나님을 만나 뵌다. 황진수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소아 진료소 소아과 의사들 어머니 모습

2023-07-31

[수필] 천국에서 온 편지

최인호 작가가 살았을 때 고 김수환 추기경이 그에게 물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이 어딘지 아세요?” 잘 모르겠다고 하니 “머리에서 출발해서 가슴까지 오는 여행이지요.” 최 작가는 그 말뜻을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의 에세이 모음 책인 ‘천국에서 온 편지’에서 “어머니의 편지가 내 마음의 우체통에 도착하는데 꼬박 3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라고 고백했다.   한국에서 가장 성공했던 작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 중 한 분이 최인호 작가일 것이다. 고등학생 때 그의 소설이 신춘문예에 입상했다. 일간지에 연재된 ‘별들의 고향’의 엄청난 인기로 여기저기서 ‘경아’라 불리는 분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어  ‘상도’를 비롯한 수많은 영화 시나리오 작품들이 계속 흥행에 성공해 큰 명성을 누렸다. 그러다가 2008년, 63세의 나이에  침샘암 진단을 받았다. 다음 해 35년간 연재하던 ‘샘터’ 잡지의 ‘가족’을 비롯해 모든 집필을 중단했다. 그가 세상 떠나기 3년 전인 2010년에 출간된 ‘천국에서 온 편지’에서 그의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 그리고 속죄와 그리움으로 오열하는 최 작가의 모습을 330여 페이지 내내 볼 수 있었다. 필자도 어머니를 회상하면서 잊고 있었던 어머니의 희생적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속죄하는 마음에 크게 공감을 했다.     최 작가의 부친은 변호사였는데 1955년 48세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남편보다 한 살 어렸던 그의 어머니는 47세에 홀로되어 9남매를 키웠다. 딸을 두 번  낳고, 또 쌍둥이 딸을 두 번이나 낳아 딸만 6명이 되었는데 그중 세 딸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남아선호가 심했기에 어머니는 시댁에 죄인처럼 사셔야 했다. 필자의 어머니도 딸만 셋을 낳았을 때 가까운 친척이 아버지에게 첩을 얻어 아들을 낳아 대를 이으라고 말했다고 하니 어머니들이 받은 수모와 심적 압박감은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 작가의 어머니는 7번째로 장남인 형을 낳고 필자의 어머니는 4번째 형을 낳게 되어 두 어머니는 비로소 한숨을 돌린 셈이다.   최 작가는 8번째로 태어나기 전 그의 어머니는 임신 중독증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38선이 생겨나 이북에 있던 그의 가족들은 사업차 남한으로 간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남하하려는 남동생을 따라 그의 어머니가 만삭의 몸으로 무작정 따라나섰다. 배가 너무 불러 지게를 거꾸로 타고 넘어왔다고 한다. 그때 어머니가 만삭의 몸으로 월남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북에서 태어나 김일성을 찬양하는 노랫말을 짓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회상했다. 1945년 10월 출생 시 머리가 아주 커서 어머니가 출산에 무척 고생했다는데 그의 별명이 ‘남북대가리’였고 ‘대갈장군’이었다. 성인이 되면서 머리 크기가 다른 신체와 균형을 잡아갔다.   최 작가가 10살쯤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에 어머니가 혼자 가장 노릇을 하며 6남매를 먹이고 학교 교육을 시켜야 했다. 방 하나에서 모든  식구가 살고 남은 방 2개를 하숙이나 세를 주고 먹고 살아야 했다. 많은 식솔을 부양하러 어머니가 지독한 절약 생활을 할 때 최 작가는 불평하면서 학교 핑계로 어머니를 속이고 돈을 더 타냈다고 속죄한다.     필자의 어머니는 청각 장애가 있던 아버지와 결혼해 8남매를 낳았다. 막내는 태어나자마자 숨져 7남매를 키우셨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은행 부도를 내서 집에는 세간마다 빨간 딱지가 붙었다.  고등학생인 넷째 누나는 큰누나네로, 중학생인 나는 둘째 누나네로 가서 몇 년을 얹혀살아야 했다. 집안 살림만 하셨던 어머니가 생활 전선에 나서야 했고 시장 노점에서 꽃을 팔아 생활을 이어갔다. 그렇게 어렵게 번 돈으로 내 대학 입학금을 마련해 주셨는데 어머니의 고생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리다.   최 작가는 어머니가 다리를 못 쓰고, 당뇨병 합병증으로 눈도 잘 못 보셔서  휠체어에 태워 모시고 민속촌을 구경하면서 울고 또 울었다고 했다.  손을 보니 쉴 새 없이 일해서 두터운 손의 지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고했기에 자기는 엄청난 죄인이라고 탄식했다.  그러면서 아들 된 도리로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을 데리고 어머니를 찾아갈 때마다 “나는 정말 어머니 모습을 보는 것이 끔찍하게 싫고 고통스러웠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하기 싫은 숙제를 하듯 비틀어진 다리를 십 분 정도 주무르고 "오마니, 갑니다. 안녕히 계시라우요"하며 도망치듯 빠져나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최 작가는 그의 어머니가 늘 쥐색 두루마기를 입고 멋과는 상관없는 구식할머니였는데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머리를 빗고 립스틱 바르고 동그랗게 눈을 뜨고 미소 짓는 게 낯설게 보여 그냥 찍으라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타박했던 사진이 영정사진이 되어 영안실에서 여주인공처럼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보고 울고 또 울었다고 한다. “비록 평생을 낡아빠진 남루한 옷처럼 살아온 인생이지만 여성이기를 포기하지 않으시려는 어머니의 안간힘을 무시하고 이를 박탈하려고 애썼던 내 태도가 실은 잔인한 고문이며 간접적인 살인행위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늘 맛있는 것이나 좋은 옷을 싫어하는 줄 알았지만 그것들이 자식들을 위한 배려였던 것을 어머니 나이가 되고 보니 비로소 그 깊은 뜻을 알게 되었다.       최 작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천주교에 입교하시게 된 계기로 온 가족이 천주교를 믿게 된다, 어머니 장례식에서 최 작가는 자기가 쓰던 천주교 묵주를 어머니께 드리고 대신 어머니 묵주를 유품으로 받았다.  최 작가는 외출할 때마다 오른쪽 주머니에 어머니의 묵주를 넣고 만지면서 언제나 어머니 손과 마주 잡고 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어머니 손은 농부의 손이었고 광부의 손이었고 거인의 손이었다” 라고 고백한다. 이제는 최 작가와 부모님 모두 천국에 계시므로 더는 천국에서 편지를 주고받을 일은 없고 함께 손을 잡고 낙원을 걷고 있을 것이다. 윤덕환 / 수필가수필 천국 편지 어머니 모습 그때 어머니 시절 아버지

2023-03-23

[이 아침에] 사진으로만 남은 사람들

 시어머니의 병세가 위중하다며 한국으로 나간 친구가 소식을 보냈다. 장례식을 치렀다는 거다. 슬퍼하고 위로하고. 여덟 명의 친구들이 카톡방에서 와글거렸는데 오늘은 난데없는 흑백 사진이 줄줄이 올라왔다. 세일러복에 단발머리 여중생 둘이 나란히 앉은 모습, 옆 가르마 탄 머리를 살짝 뒤로 묶은 여고생이 서로 팔짱을 낀 모습. 시어머니의 소녀시절이라고 한다. 사진에 단기 4282라고 적혔으니 서기로는1949년이 되는 셈이다. 그 시절에도 교련이 있었는지 교련복을 입고 정렬한 사진도 있다.     앳된 소녀가 아흔 살이 되기까지 살아온 골목 구석구석을 담은 사진이 얼마나 많을까. 노인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고 하던데 그 큰 도서관의 기록을 모두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자식에게는 부담이겠구나 싶다.   몇 년 전이었다. 집을 옮겨 볼까 하고 동네를 뒤지고 다녔다. 어느 날 등 뒤로 언덕을 끼고 앉은 고풍스러운 이층집을 살피다가 마당 구석의 창고까지 열어보게 되었다. 그곳에는 가지런히 정리된 풀장 장난감과는 어울리지 않는 대형 흑백 사진이 하얀 눈을 맞은 듯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멋진 신사와 금발의 여대생이 여러 사람의 박수를 받으며 악수를 하는 장면이 담긴, 대저택의 거실 벽을 다 차지했음직한 크기의 패널이었다.     “이 집 주인의 어머니가 대학생 때 찍은 사진인데요, 학교를 방문한 트루먼 대통령을 영접하는 장면이래요.” 감탄을 하는 나에게 부동산 에이전트가 말해 주었다. 부모의 사별 후 집을 물려받은 아들이 가구는 모두 처분했지만 차마 이 사진은 어쩌지 못해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자대학교의 대표로서 대통령을 맞이하는 영광은 남의 추억일지라도 매우 자랑스럽다. 그것은 집안의 가보가 되어 거실 중앙을 차지하고 모든 사람의 찬탄과 부러움을 받았을 터인데.     집으로 돌아와서 대통령과 여대생을 다시 떠올렸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머니 살아계실 때처럼 그대로 거실에 걸어두고 손자에 손자, 그 손자에 손자까지 할머니, 증조할머니, 고조할머니라며 우러러보게 했을까? 혼자 킥 웃었다.     그건 아니다. 우리는 모두 개별자가 아닌가. 내 안의 날카로운 비명이나 예민한 살갗의 느낌을 누가 나랑 똑같이 공감할 수 있을까. 내 손가락으로 그리는 V자를 타인에게도 강요할 수는 없다. 나의 고통의 궤적이나 기쁨의 흔적은 육체의 소멸과 함께 사라지는데 무슨 미련으로 여기저기 자국을 남길까. 떠나는 자는 앉은 자리를 스스로 치우고 갈 일이다. 결론을 내리고는 쓸쓸해했다.     이제 친구는 시어머니가 남겨 둔 유품을 처리하느라 바쁠 거다. 옷과 가구는 기부하거나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거고 현금과 통장은 당연히 해낙낙하며 챙기겠지. 그런데 어머니 모습은 감히 어떻게 정리할까.     생각해 보니 풀고 가야 할 숙제가 생겼다. 언젠가는 알 수 없지만 내게도 어둑발이 내리는 시간이 올 거다. 그때는 다른 건 미처 못 하더라도 사진 정리는 꼭 해 주어야겠다. 묵은 앨범을 뒤적여 아이들 사진은 골라 본인에게 나눠주고 우리 부부 사진은… 거기까지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성민희 / 수필가이 아침에 트루먼 대통령 골목 구석구석 어머니 모습

202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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